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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용진 바이어의 와이너리티 리포트
연말연시 와인 고르기, 이것만 알면 끝!
명용진 바이어


바야흐로 와인의 계절입니다. 연중 어느 때나 마셔도 좋은 것이 술이지만, 왠지 추운 겨울에는 와인이 먼저 떠오릅니다. 와인의 강렬한 붉은색이 따뜻한 느낌을 주기 때문인 것 같은데요. 오늘은 와인의 계절을 맞아 ‘직관적인 와인 쇼핑’ 시간을 준비했습니다.


와인을 살 때면 많은 분이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매번 마셨던 와인을 마실까? 유명한 브랜드 와인을 골라볼까? 아니면 모르겠으니 그냥 싼 와인으로 골라?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지는 느낌입니다. 쭈뼛쭈뼛 와인 매장에 어렵게 들어서면,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합니다. 매장 직원의 ‘어떤 스타일로 찾으세요?’라는 질문에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아… 내가 왜 술 한잔 마시는데, 이런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과 함께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오죠.


우선 화를 가라앉히세요. 이제 저와 함께 와인 쇼핑을 시작해 보시죠! 와인을 전혀 마셔보지 못한 분들도 괜찮습니다,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칠레 와인을 고르는 공식, 등급을 확인하라!



뚜벅뚜벅 와인 매장을 향해 걸어가며 머릿속으로 생각해 봅시다. ‘얼마짜리 와인을 살까? 무슨 맛인지 모르지만 맛있는 와인이면 좋겠다.’ 이 두 가지만 생각하셔도 나머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함께 쇼핑 중이니까요. 자, 이제 매장에 들어섰습니다. 어디로 갈까요? 행사 상품을 모아놓은 매대도 보이고, 국가별로 와인이 분류된 진열대도 보이고, 고가의 상품이 보관된 와인 셀러도 보입니다.


먼저, ‘신대륙’ 또는 ‘칠레’라고 쓰인 진열대로 가세요. 프랑스, 이태리 와인도 참 좋은 상품이지만 오늘은 패스하겠습니다. 오늘의 픽이 칠레인 이유는 이마트에서 와인 매출 비중이 37%로 가장 높은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칠레 와인 중에서는 가성비가 좋은 와인도 많이 찾을 수 있답니다.


칠레 와인만 모아놓은 진열대로 왔는데… 와인 종류가 어마어마합니다. 또 눈앞이 흐릿해짐이 느껴지죠. 다시 정신을 집중해서 라벨을 주시해보세요. 대체로 일관된 형식의 라벨입니다. 브랜드 이름이 블라블라 쓰여있고, 같은 브랜드 안에도 어떤 와인에는 ‘리제르바’, 어떤 와인에는 ‘그랑 리제르바’라고 쓰여 있네요. 이제 가격표를 보세요. 리제르바와 그랑 리제르바가 가격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칠레 와인의 공식은 간단합니다. 일반적으로, ‘브랜드 이름만 쓰여 있는 버라이탈(Varietals)’, ‘리제르바(Reserva)’, ‘그랑 리제르바(Gran Reserva)’, ‘싱글빈야드(Single Vineyard)’로 순으로 가격이 올라갑니다. 해당 등급 내에서는 대체로 맛도 비슷한 편입니다. 때문에 내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등급을 정하고, 해당 등급에서 좀 더 저렴한 브랜드의 와인을 고르시면 됩니다. 물론 브랜드별로 양조 방법이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 등급별 맛은 비슷합니다. 몇 번 마시다 보면 내 취향의 와인 브랜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조금씩 좋아하는 와인의 스펙트럼을 확장하다 보면, 언젠가는 선호하는 국가와 지역, 품종, 브랜드까지 생기게 되겠죠?


오늘은 와인 매장에 가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많은 분을 위해서 간단히 칠레 와인 섹션 쇼핑을 안내해드렸는데요. 간단한 공식만으로도 혼자서 쉽게 와인을 골라 마실 수 있습니다. 한번 도전해보세요!



▍스파클링 와인이냐 샴페인이냐, 당도가 중요하다!



이렇게 오늘의 쇼핑을 끝내려고 생각했는데… 곧 와인의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가 다가오네요. 그럼 간단하게 스파클링 와인과 샴페인도 함께 골라 드릴게요. 지난 칼럼에서도 이야기했는데요, 모든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샴페인이라는 명칭을 쓸 수 있는 것은 프랑스 상파뉴(Champagne) 지방에서 만들어진 스파클링 와인뿐입니다. 꼭 기억해주세요!


최근에는 신대륙 스파클링 와인도 샴페인 방식으로 만들어서 품질이 많이 좋아졌답니다. 스파클링 와인 역시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고르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스파클링 와인 고르는 방법도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스파클링 와인을 가격순으로 나열하면 신대륙 스파클링 와인 ≤ 스페인 까바 ≤ 프랑스 크레망 ≤ 샴페인 순입니다. 최근에는 샴페인도 전략적으로 수입량을 늘려서 가격을 낮춘 상품들이 많습니다. 2만 원 대부터 시작해 다양한 가격대의 상품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만원대 샴페인이 눈에 보인다면 일단 한 병 장바구니에 담아보세요. 워낙 콧대 높은 샴페인이라, 저렴하다 해도 틀림없는 샴페인이니까요. 저렴하게라도 신선한 기포를 느끼고 싶다면, 원산지가 스페인인 스파클링 와인 ‘까바’를 추천합니다. 호불호 없이 무난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스파클링 와인을 고를 때는 당도를 살펴봐야 합니다. 먼저 샴페인 라벨을 한 번 보겠습니다. 대부분 샴페인 라벨에는 ‘Brut’이라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드라이 하단 뜻입니다. 그와 달리 ‘Demi sec’ 또는 ‘Doux’라고 적혀 있다면 당도가 있는 상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샴페인이 아닌 다른 스파클링 와인도 보통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당도를 분류합니다. 가끔 정말 쉽게 dry 또는 sweet로 표시하는 경우도 있지만요. 당도를 드라이에서 스위트 순으로 나열하면 Brut nature > extra brut > brut > extra dry > sec > demi sec > Doux 순입니다.


당도는 라벨에 적혀 있는 분류 용어 말고도 알코올 도수로 유추해 볼 수 있어요. 보통 드라이한 스파클링 와인은 12도 이상입니다. 9도 이하의 상품은 당도가 있다고 보면 됩니다. 와인 고를 때 유심히 관찰해보세요!


매회 칼럼을 쓸 때마다, 더 많은 분이 와인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전문 용어를 사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오면 난감해집니다. 물론 용어를 알아두면 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 하지만 전문 용어가 낯설고 어려운 느낌이라면, 우선은 무시해도 괜찮습니다. 와인을 즐기다 보면 용어는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니까요. 와인을 쉽게 고르는 데는 전문 지식보다 제가 알려드린 작은 팁이 더욱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다들 와인과 함께 로맨틱하고 우아한 연말연시 보내세요!




이마트 명용진 바이어


치킨에 맥주 마시듯 

와인을 친근하게 알리고 싶은 와인 바이어. 

평범한 일상을 와인만으로 특별하게 만들길 원한다. 

새로운 형태의 프로모션과 혁신적인 가격, 

고품질 와인에 힘쓰고 있는 와인계의 이슈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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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지붕 위에 청색을 허하라!”
김 석
#김석기자


경복궁 뒤편 백악산(북악산) 기슭에 자리 잡은 대한민국 대통령의 관저.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1960년 4·19혁명 이후 윤보선 대통령 시절에 옛 이름인 경무대(景武臺)를 버리고 새로 쓰기 시작한 이름 청와대(靑瓦臺). 중심 건물인 본관은 2층 화강암 석조에 지붕에는 청기와(靑瓦)를 얹었죠. 그래서 청와대라 이름 붙인 겁니다.



이렇게 건물 지붕에 청기와를 쓴 데는 역사적 유래가 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고려시대 역사를 서술한 《고려사》입니다. 의종 11년인 1157년 4월 기사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대궐 동쪽에 이궁(離宮)을 완성했다. 또 민가 50여 채를 허물어 태평정(太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명하여 현판을 쓰게 했다. 정자 남쪽엔 연못을 파고 관란정(觀瀾亭)을 지었으며, 그 북쪽에는 양이정(養怡亭)을 세우고 청자로 덮었다.


고려는 명실상부 청자(靑瓷)의 나라였죠. 청자 하면 흔히 도자기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겠지만, 고려인들은 정말 온갖 자질구레한 일상용품까지도 청자로 만들어 썼습니다. 그러니 기와를 청자로 만들었다고 해서 하등 이상할 게 없죠. 대표적인 청자 생산지로 꼽히는 전남 강진 사당리 가마터에서 출토된 청자기와가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청자로 만든 기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출토, 고려 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 고려실에서 만날 수 있는 청자기와입니다. 고려시대에 최고급 청자를 생산한 대구소(大口所)가 전남 강진에 있었죠. 바로 그 자리에서 발굴된 귀한 유물입니다. 답사기로 유명한 미술사학자 유홍준 교수는 《국보순례》라는 책에서 국보 지정 여부와 상관없이 이 청자기와를 ‘국보’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한 편의 드라마 같았던 청자기와 발견 비화


심지어 이 희귀한 유물은 발견된 과정 자체가 한 편의 드라마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청자 하면 첫손에 꼽은 곳이 개성박물관입니다. 당시 국보급 청자가 여러 점 소장돼 있었다고 하는데요. 이 박물관의 초대 관장이자 한국 미술사학의 선구자 우현 고유섭(1905~1944) 선생이 박물관 최고의 보물로 꼽은 유물은 수두룩한 국보 청자가 아니었습니다.


청자기와를 하나하나 만들려면 고도로 숙련된 기술이 필요합니다. 고려시대에 청자기와로 정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청자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청자기와로 덮은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도 청자기와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세계적으로 아주 귀한 유물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깨진 것만 보존돼 있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또 어디서 이것이 생산됐는지 아무도 몰라요.


<청자 기와편>, 고려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유섭 선생이 청자기와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만하죠. 당시 개성박물관에 있던 청자기와 조각은 고려의 왕궁이 있던 개성 만월대 인근에서 발견된 것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습니다. 그런데 스승의 못다 이룬 꿈이 못내 안타까웠던 제자가 있었으니 이분이 바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미술사학자 혜곡 최순우(1916~1984) 선생입니다.


1964년 5월의 어느 날, 전남 강진 사당리 일대를 돌고 있던 최순우 일행에게 한 아주머니가 청자 파편이 가득 담긴 소쿠리를 들고 옵니다. 최순우는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질 뻔했죠. 전대미문의 청자기와 암막새 파편 하나가 눈에 띈 겁니다. 전설처럼 전해오던 청자기와의 실체가 마침내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습니다.


역사기록에 나오는 청자기와의 실물을 보고 가슴이 뛰어 말이 안 나왔다. 당시 조사단에는 지방대학의 실습 학생들도 많이 참가하고 있어 청자기와 발견 사실이 알려지면 조사에도 지장이 있지만, 고가의 귀중한 청자기와가 흩어질 염려가 있어 정양모 씨와 둘이서만 알고 서울 올라올 때까지 비밀로 하고 조사했던 일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유쾌한 추억”이라고 최 관장은 당시를 회고한다...(경향신문, 1975.5.10)


《미술자료》 9호(1964년 12월 발간)에 수록된 당시 발굴 현장 사진


알고 보니 소쿠리를 들고 나타난 아주머니의 집 안팎이 온통 고려청자 파편으로 가득했던 겁니다.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완형에 가까운 청자기와와 파편들이 수습됐습니다. 연구자들의 애를 태운 역사의 수수께끼는 그렇게 풀렸습니다. 이런 사연이 전기 작가 이충렬이 쓴 최순우 전기 《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에 극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궁궐에 남아 있는 청기와의 흔적들


창덕궁 선정전 (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현재 남아 있는 궁궐 건물 가운데 청기와 지붕 건물이 딱 하나 있습니다.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입니다. 조선시대에는 건물 지붕에 청기와를 사용한 경우가 꽤 많았던 것 같습니다. 창덕궁관리소장을 지낸 신희권 서울시립대 교수가 최근에 펴낸 책 《창덕궁, 왕의 마음을 훔치다》를 보면 광해군 때 청기와 재료 공급 문제를 논의한 내용이 소개돼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중초본》 광해 9년(1617) 6월 27일 기사입니다.


영건 도감이 아뢰기를 “일찍이 성상의 분부로 인하여 청기와 30눌(訥)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안에서 내려준 염초(焰硝) 2백 근을 쓰는 외에, 부족한 숫자는 무역해 오면 자연 이를 옮겨 써서 구워낼 수가 있습니다. 다만 이외에 또 때때로 계속해서 구워내고자 하면 미리 마련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성상의 분부대로 도감에 있는 은(銀)을 동지사(冬至使) 편에 보내어서 그로 하여금 사오게 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청기와를 구워내는 데 필요해서 무역해 오는 물품은 넉넉하게 사오게 하라.”하였다.


영건도감은 건설 공사를 담당하는 임시 기구입니다. 당시에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지붕에 얹을 청기와 재료로 염초(焰硝)를 썼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대목이죠. 염초는 화약을 만드는 핵심 원료로 쓰였던 것인데, 청기와 안료로도 썼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기록한 사관(史官)은 굳이 수입까지 해야겠냐며 비판적인 논평을 붙여 놓았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중략) 하대(夏代) 말기로 내려와 곤오(昆吾)가 기와를 구운 것에 대해서 검소한 덕을 숭상하는 임금이 이미 사치스럽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 반드시 만 리 바깥에서 회회청(回回靑)을 사와서 정전(正殿)의 기와를 문채 나게 한 다음에야 서울을 우뚝하게 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더구나 지금 적당한 시기가 아닌데 크게 토목공사를 벌려서 국가의 재정이 탕갈되었는데이겠는가. 그런데도 도감을 맡고 있는 자들은 매번 사치스럽고 크게 하기만을 일삼으면서 일찍이 한 사람도 한마디 말을 하여 폐단에 대해 진달해서 만 분의 일이나마 폐단을 구제하지 않으니, 애석하도다.


고려대 박물관 소장 <동궐도>에 그려진 경훈각


청기와가 비용이 꽤 많이 드는 사치스러운 재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회회청(回回靑)은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값비싼 수입 안료였습니다. 신희권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후기 창덕궁을 상세하게 그린 〈동궐도〉에서 청기와 지붕 건물은 선정전과 경훈각 두 채입니다. 조선 후기가 되면 국가 재정 때문에 청기와를 거의 쓰지 않았다는 것을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겁니다. 지금은 조선 궁궐 전체를 통틀어 선정전 하나만 남았고요.


사용하지 않으면 기술에 녹이 스는 법이죠. 고종 때 흥선대원군의 지휘 아래 경복궁을 대대적으로 다시 지으면서 청기와를 만들어보려 했던 사실이 당시 공사 일지인 《경복궁 영건일기》에 기록돼 있습니다. 고종 2년(1865) 7월 30일의 기록입니다.


청와(靑瓦)를 구워내도록 한 일을 거두고 와장(瓦匠) 8명을 방송(放送)하였다. 대개 청와는 일반적으로 굽는 기와가 아니라서 그 법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 분원점(分院店)에 사기(沙器)를 만드는 흙으로 청와를 조성하게 하였더니, 1개 만드는 데 소비되는 비용이 8냥에 달했다. 다시 흙기와[土瓦]를 만들어 청화(靑花)를 바르고 구워냈더니 물색(物色)이 혼합되어 온전하게 모양을 이루지 못했으므로 다시 구워진 기와의 표면에 붕사(硼沙)를 바르고 황단(黃丹)을 두 번째로 바르고 미호(米糊)를 세 번째로 바른 뒤 파란(波蘭)을 더해서 구워내었더니 색과 모양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예전 것만 못했다. <와장> 8명이 스스로 잘 만들 수 있다기에 시험해 보았지만, 또 해내지 못했으므로 곧바로 방송하였다.



▍실패 또 실패…맥 끊긴 청기와 제작 기술


국립중앙박물관 앞 연못가에 있는 청자정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는 얘기입니다. 만드는 것도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드는 데다, 결정적으로는 원하는 품질을 얻지 못한 것이죠. 기와는 만들 수 있어도 제 색깔이 안 나오면 궁궐 지붕에 올릴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이 대목은 대대로 전해지던 전통 청기와 제작 기법이 단절되었음을 선언하는 장면으로 읽힙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서울 홍대 인근에 있었던 청기와 주유소는 이 동네의 랜드마크로 여겨졌습니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없을 때는 길을 찾아갈 때 누구나 아는 건물을 기준으로 방향을 잡았으니까요. 청기와 주유소는 홍대 인근으로 가는 기준점이었습니다. 뜻하지 않은 그 명성(?)이 청기와를 얹었다는 특이성 때문에 생겨난 건 아닐까요.


국립중앙박물관 연못가에는 청자로 지붕을 만든 꽤 운치 있는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 정자는 한국 박물관 개관 100주년을 기념해 2010년에 국립중앙박물관을 용산으로 옮기면서 새로 지은 겁니다. 안내판을 보면 앞서 소개해드린 《고려사》의 기록에 근거해서 지었다고 돼 있죠. 이 아담하고 근사한 정자는 과거의 유산을 현재로 불러낸 기억의 타임머신입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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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음식을 쓰다
이탈리아 여행 대신
서울 이탈리안 레스토랑 BEST3
정동현
#정동현


이탈리아에서 처음 먹은 파스타는 볼로네제 파스타였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볼로냐 대학이 있는 그 볼로냐에서 유래한 볼로네제 파스타는 흔히 ‘미트소스’라고도 불린다. 만드는 방법을 요약하면 고기와 양파, 당근 등을 볶고 토마토를 넣어 푹 우려낸다고 보면 된다.



볼로네제 파스타는 몇백만에 달했던 미국 이탈리아 이민자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 토마토, 치즈, 고기의 조합은 감칠맛을 폭발적으로 끌어냈다. 여기에 파스타를 버무리면 동양이든 서양이든 어디서나 친숙한 ‘면 요리’가 된다. 미국에 널리 퍼진 볼로네제 파스타는 해방과 6.25를 거친 한국에도 미군 부대를 통해 상륙했다. 풍요로운 미국에서 소스와 고기는 흥건해졌고 한국에 와서는 파스타를 국수처럼 푹 익혀냈다.


이탈리아에서 먹은 볼로네제 파스타는 약간 실망스러웠다. 소스에 감칠맛이 엄청나게 나지도 않았고, 고기의 질도 좋지 않았다. 허브도 살짝, 소스도 살짝, 파스타를 비빌 정도로만 나왔다. 다른 파스타들도 마찬가지였다. 인당 한 접시씩 먹는 파스타의 양은 밥 세 공기 정도 되는데 소스는 간장 종지 정도 되는 분량이었다. 파스타 면은 뻑뻑하고 간은 강하며 양도 많아 도저히 완식할 수 없을 때도 잦았다.



하지만 한국에 돌아와 눈을 감으면 그때 먹던 파스타들이 떠오른다. 소스가 흥건하지도, ‘건더기’가 많지도 않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뭔가가 그들이 먹는 파스타에 있었다. 재료의 간결함, 배를 부르게 하는 푸짐함, 격 없이 풍성한 식탁을 한가득 차려놓고 가족들이, 연인들이 세련되게 차려입고 맞이하는 저녁의 한가한 날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끈끈한 정, 오랫동안 가난했기에 더욱 소중했던 식사, 그 시절 배고픔을 상징하는 산더미 같은 파스타, 언제나 사랑을 노래했던 열정적인 민족.



이것이 이탈리아 본토의 맛, 청담동 Terra13



청담동 Terra13은 이탈리아 요리사 ‘소르티노’의 레스토랑이다. 그의 음식을 관통하는 철학은 현지의 재료를 사용하며 절대적으로 확실한 ‘간’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 이 때문에 Terra13 메뉴판에는 지리산 흑돼지 같은 익숙한 이름이 산재한다.


이탈리아식 소금간의 정석을 맞춘 Terra13의 요리


음식 맛을 보면 쨍하게 떨어지는 소금간이 중심에 있다. 한국이나 일본은 소금의 역할보다는 단맛, 감칠맛, 매운맛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 국물 요리가 많기 때문에 그런 경향이 더욱 두드러진다. 이탈리아는 대신 소금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비교적 적은 양의 소스로 맛을 내야 하기 때문에 단위 중량 당 염도도 높다. 그러나 국물을 마셔대는 한국 일본에 비해서 절대적인 염분 섭취량은 낮다. 이런 특성 때문에 한국 사람이 이탈리아 본토 파스타를 먹으면 ‘짜다’는 반응이 십중팔구다.


Terra13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식전빵과 전채요리, 파스타


그래서 한국 이탈리아 음식점은 소금간을 낮추는 것이 하나의 필승전략이 되었다. 슴슴한 이탈리아 요리라는 말은 달지 않은 디저트와 동격임에도 그렇다. Terra13은 이런 면에서 완고하다. 식전빵에는 입자가 큰 소금과 올리브유가 발라져 있다. 오븐에서 살짝 구운 빵을 한 입 먹으면 달달한 뒷맛이 느껴지는 소금 맛이 크게 다가온다. 덩달아 와인 한잔을 벌컥벌컥 마시게 된다. 모든 메뉴가 일정 수준 이상이지만 이 집에서는 특히 전채와 파스타류를 섭렵해보는 것이 좋다.


대표 메뉴인 ‘블랙 트러플 페스토 파케리’는 일종의 크림 파스타다. 크림을 쓴다는 면에서 완벽한 정통 이탈리안이라고는 볼 수 없다. 하지만 부대찌개를 한식으로 봐야 하냐는 논쟁처럼 음식이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이 파스타를 먹으면 허브 타임(thyme)을 우려낸 진득한 크림과 트러플의 오묘한 향기, 그 모두를 아우르는 소금간에 입맛이 쭉 돋는다. 그리하여 어쩔 수 없이 또 다른 와인잔을 비우게 되고 빈 접시는 늘어만 간다.



맛도 멋도 더 깔끔하게, 상수동 브렛피자



상수동의 ‘브렛피자’는 상호처럼 피자가 주다. 이탈리아에 온 듯한 Terra13과 달리 (어둑하고 소품이 많다는 뜻이다) 브렛피자는 주인의 성향처럼 단순하고 정갈하다. 말끔히 정돈된 실내처럼 음식 역시 잡티 하나 없이 균형을 이룬다. 보통 나폴리 피자는 500도 가까이 되는 고온의 오븐에서 2분 안팎으로 빠르게 익힌다. 브렛피자는 그보다 낮은 온도에서 굽는 시간을 오래 가져간다. 빵처럼 구운 맛과 단단하고 바삭한 식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이탈리아 현지에서 볼 수 있을법한 브렛피자의 화덕


이탈리아 삼색 국기를 본따 만들었다는 마르게리타 피자는 주인장의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는 음식이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먹었던 마르게리타 피자는 분명 흠잡을 곳 없었지만 채 날아가지 않은 수분 때문에 피자 도우 밑이 흐느적거렸다. 나폴리 피자집 대부분이 그렇다. 브렛피자에서 먹은 마르게리타 피자는 수분이 고르게 날아가 질척거리지 않았다. 대신 빵을 구웠을 때 나오는 고소한 향, 조밀한 질감, 산미가 확실히 살아있는 토마토, 촉촉한 모짜렐라 치즈가 하나로 뒤엉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맛을 냈다.


브렛피자의 대표 메뉴 마르게리타 피자와 가을 한정 메뉴 무화과 피자


가을 한정으로 내놓는 무화과 피자 역시 이 집의 지향점을 보여주는 메뉴 중 하나다. 무화과에 설탕을 뿌리고 토치로 그을려 단맛을 최대한으로 뽑아낸 다음 스페인 산 하몽을 올리고 구워낸 이 피자는 단맛과 짠맛, 도우의 구수한 향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즉흥적이기보다는 철저히 조율되고 계산된 맛이다.



이탈리아를 그대로, 이태원 일키아소



만약 이탈리아 본토의 맛뿐만 아니라 분위기 모두를 원한다면 이태원 ‘일키아소’를 찾는 것을 추천한다. Terra13처럼 이탈리안 요리사가 주방에 서 있는 이곳은 주문도, 요리도 모두 이탈리아어로 한다. 낮은 천장, 가득한 소품, 아늑한 조명, 친절한 종업원, 이 모두가 이탈리아에서 목도한 것들이다.


일키아소의 프로슈토 햄과 파스타


주문을 구령처럼 여겨 그때그때 잘라내는 프로슈토 햄은 오래된 불쾌한 냄새 없이 갓 딴 와인처럼 상큼한 향기가 난다. 정확한 몸놀림으로 볶아낸 파스타는 소스와 면이 하나가 된 것처럼 찰싹 붙어 있다. 그 ‘하나’를 입에 넣으면 마치 애정 어린 연인의 스킨십처럼 농밀한 감각이 온몸에 퍼진다.


치즈의 풍미가 살아있는 파르미자노 리소토


이 집에서 꼭 시켜야 하는 메뉴는 ‘파르미자노 리소토’다. 트럭 뒷바퀴만 한 파르미자노 레자노 치즈를 절반으로 자른 뒤 뜨겁게 익혀낸 리소토를 올린 뒤 손님 앞에서 비벼낸다. 감칠맛이 실타래처럼 엉킨 치즈 범벅이 된 리소토를 접시에 올린 다음에는 그 접시 밑을 툭툭 쳐 평평하게 만든다. 그러면 리소토가 조금씩 퍼지는데 이때 죽처럼 흐물거려서도 안 되고 또한 너무 뻑뻑해서 탑처럼 쌓여 있어도 안 된다. 그리고 남은 일은 리소토를 입에 넣는 것뿐이다. 그 흔한 건더기도 없다. 오로지 소스와 쌀 뿐이다. 그러나 그 하모니는 복잡하고 잡다한 구성을 저 멀리 뛰어넘는다. 너와 나 사이에는 그 무엇도 필요 없듯이, 그 간결한 조합 앞에 사람들은 저절로 웃음을 짓고 붉은 와인을 모자름 없이 따른다. 


이탈리아에서 보았던 것은, 모자름 없는 애정이었다. 풍족하지 못하더라도 아낌없이 주는 마음이었다. 우리가 식사를 할 때 바라는 모든 것이 그 작은 접시 위에 있었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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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 기자의 문화이야기
한국에도 괴물이?! 한국 괴물의 역사
김 석
#김석기자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본 ‘괴물’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흔히 괴물이라고 하면 사람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말 그대로 괴상하게 생긴, 그러면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를 떠올리게 되죠. 영화에서 이미 숱하게 보아온 괴물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세요. 작게는 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작은 괴물부터 크게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거대 괴수까지 긴 역사 속에서 인간은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괴물들을 지어내고 또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괴물이 아니라 물괴(物怪)라고?


영화 <물괴> 포스터


본 영화는 조선왕조실록 중종 22년에 실린 본문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임을 알려드립니다.


지난해 개봉한 영화 <물괴> 보셨습니까.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런 자막이 나옵니다.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근거해서 만들었다는 거죠. 괴수 영화와 사극을 융합한 새로운 장르의 탄생을 기대했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처참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주목을 받았던 건 우리 역사에 남아 있는 우리 괴물을 소재로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실록에는 도대체 뭐라고 적혀 있을까요?


밤에 개 같은 짐승이 문소전(文昭殿) 뒤에서 나와 앞 묘전(廟殿)으로 향하는 것을, 전복(殿僕)이 괴이하게 여겨 쫓으니 서쪽 담을 넘어 달아났다. 명하여 몰아서 찾게 하였으나 얻지 못하였다.


≪중종실록≫ 1511년 5월 9일 기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밤에, 개처럼 보이는 짐승이, 궁궐에 나타났기에, 쫓아갔더니, 달아나서, 찾아봤지만, 못 찾았다는 겁니다. 이 정체 모를 짐승이 개와 비슷하다며 수류견(獸類犬)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짐승은 16년 뒤에 또 나타납니다.


간밤에 소라 부는 갑사(甲士) 한 명이 꿈에 가위눌려 기절하자, 동료들이 놀라 일어나 구료(救療)하느라 떠들썩했습니다. 그래서 제군(諸軍)이 일시에 일어나서 보았는데 생기기는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것이 취라치(吹螺赤) 방에서 나와 서명문(西明門)으로 향해 달아났습니다. 그리고 서소위 부장(西所衛部長)의 첩보(牒報)에도 ‘군사들이 또한 그것을 보았는데, 충찬위청(忠贊衛廳) 모퉁이에서 큰 소리를 내며 서소위를 향하여 달려왔으므로 모두들 놀라 고함을 질렀다. 취라치 방에는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라고 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물괴의 모습


≪중종실록≫ 1527년 6월 17일의 기록입니다. 궁궐에 다시 나타난 이 짐승을 생김새가 삽살개(厖狗) 같고 크기는 망아지(兒馬) 같다고 묘사해 놓았습니다. 달리면서 큰 소리를 냈고, 머물던 방에선 비린내가 풍겼다고도 했습니다. 병사들조차 벌벌 떨 정도였다니 이 낯선 존재가 주는 공포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만하죠? 이 괴이한 짐승에 대한 흉흉한 이야기가 궐 밖까지 일파만파 퍼져나가면서 조정에선 대책 마련에 분주합니다. 꿈에 가위눌린 일을 가지고 경거망동하지 말라! 함부로 떠드는 자가 있으면 엄벌에 처하리라! 6월 25일의 기록은 계속됩니다.


삼가 살피건대 근일 궐내에서 숙직하던 군사가 괴물(怪物)이 있다는 헛소리를 전하자, 한 사람이 부르면 백 사람이 부동하듯이 휩쓸렸습니다. 그래서 심한 자는 놀래 나자빠지기도 하는 등 와언(訛言)이 마구 전파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미혹되는 것은 괴이할 것이 없지만, 유식한 자들 또한 덩달아 날조하여 요설(妖說)을 부연(敷衍), 혹은 형적이 있다고도 하고 혹은 소리와 냄새가 났다고도 하니, 근거 없는 괴설(怪說)이 어쩌면 이렇게 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 난리법석을 야기한 최초 괴담 유포자를 잡아다가 처벌해야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임금에게 호소하죠. 바로 여기에서 마침내 영화 제목으로 쓰인 물괴(物怪)란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어지는 실록의 내용을 보면 그 당시 민심이 얼마나 흉흉했는지 잘 알 수 있는데요. 심지어 임금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잠시 창덕궁에 가 있겠다고 말합니다. 신하들은 극구 만류하지만, 임금은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좌) 영화의 물괴 글씨 (우) 실록의 물괴 글씨
옥에 티. 영화에 등장하는 실록의 기록 장면을 보면 물괴의 괴를 ‘怪’로 쓰고 있지만, 실록에는 같은 뜻과 음을 지닌 ‘恠’로 적혀 있습니다.


괴담은 시절이 어지럽다는 증거입니다. 반대로 혼란스러운 시대가 괴담을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중종 연간은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했던, 한 마디로 나라가 나라답지 못했던 극도의 혼란기였습니다. 물괴, 다시 말해 괴물은 그런 어지러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불안감과 두려움이 응어리진 하나의 ‘상징’이었던 겁니다. 여러모로 영화의 소재로 딱 그만이죠. 영화가 덧없는 실패로 끝나고 만 것이 생각할수록 아쉽기만 합니다.



어느 SF 작가의 ‘이유 있는’ 괴물 탐구


뜬금없이 웬 괴물 타령이냐고요? 제가 최근에 읽은 책 때문입니다. 제목이 무려 《한국 괴물 백과》랍니다. 이름난 SF 작가인 곽재식 씨가 무려 11년 동안 18세기 이전의 문헌에 기록된 괴상한 존재들을 샅샅이 조사해서 만든, 말 그대로 백과사전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일찍이 우리에게 이런 책이 있었던가요? 도대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SF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희한한 책을 썼을까요? 저자의 서문에 그 답이 있습니다.


곽재식 《한국 괴물 백과》(워크룸 프레스, 2018). 표지부터 뭔가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깁니다.


나는 괴물 백과사전 같은 자료가 그 문화권만의 특색 있는 이야기나 예술 작품을 만드는 데 무척 귀중한 바탕이라 생각해왔다.


이 한마디로 모든 것이 명쾌하게 설명됩니다. 쓸 만한 이야깃감을 찾기 위해 라는 거죠. 소재가 고갈된 할리우드 영화가 그리스 신화부터 심지어는 북유럽 신화까지 끌어들여 영화의 소재로 삼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신화가 그 모든 이야기의 ‘뿌리’이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우리 역사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깃거리들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이 고민에 대한 결과물이 바로 괴물 백과인 겁니다. 실제로 수류견(獸類犬)에 관한 기록은 영화 <물괴>를 탄생시킨 밑천이 된 거고요.


저자가 백과사전에 담은 한국의 괴물이 무려 282종이나 된답니다. 그저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해버리기엔 진지한 기록들이 많죠. 가령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엄청난 독서광이었던 청장관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앙엽기 盎葉記》에 ‘강철(强鐵)’이란 괴물 이야기가 나옵니다. 망아지 정도 크기에 얼굴은 사자나 용 같고 사납게 날뛰어 농가에 큰 피해를 끼친다는 괴물인데요. 얼마나 큰 피해를 끼쳤으면 ‘강철이 간 데는 가을도 봄’이란 속담이 있을 정도죠. 흥미로운 건 조선 시대도 아닌 20세기에 강철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신문에까지 실렸다는 사실입니다.


깡철의 마력 / 양산군 금산부락 앞 물 들판에는 홍수가 휘몰아치던 지난 3일 깡철이란 동물 두 마리가 나타나 가산과 가족을 잃은 이재민들은 깡철 구경에 한창 법석댔는데 깡철의 움직임에 따라 그 지대 수면이 약 5미터가량 높았다 얕았다 동요하더라…(동아일보, 1957년 8월 11일)


(좌) 강철 (우) 천록
이 책에는 일러스트 작가 이강훈의 그림이 하나하나 붙어 있어서 괴물들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며 읽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천록(天祿)이라는 상상 속 동물도 있습니다. 강철과는 반대로 나쁜 사람만 골라 벌을 주는 ‘권선징악’의 존재로 묘사되죠. 크기는 작은 사슴 정도에 얼굴은 호랑이나 사자 같이 사납고 뿔이 하나 있으며 온몸이 비늘로 덮여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만 있는 강철과 달리 천록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인데,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벽사(僻邪)의 의미 덕분에 궁궐 안에도 천록을 새긴 조각상이 남아 있습니다. 2017년 9월에 제가 <경복궁, 어디까지 가봤니?>라는 글을 통해서 자세하게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데요.



간단하게 내용을 정리해드리면,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 안으로 들어서면 흥례문이 보이죠? 이 문을 지나면 ‘영제교’ 또는 ‘금천교’라 불리는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냇물이 금천(禁川)이고요. 다리 위에서 양 옆을 보면 돌짐승 네 마리가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 녀석들이 바로 천록(天鹿)입니다. 조선 태조 때 경복궁을 창건하면서부터 있었던 이 천록상들은 일제강점기에 다리가 철거되는 와중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옛 모습 그대로 전해지고 있으니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만하죠.



마음껏 괴물을 상상하라!


책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이 가슴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다는 희랑(希郞)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제가 올해 1월에 <건국 1,100년 고려 예술의 정수를 엿보다>라는 글에서 소개해드린 바 있습니다. 바로 태조 왕건의 스승이었던 불교 승려 희랑대사(希朗大師)가 그 주인공입니다. 실제로 희랑대사상을 보면 가슴 한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흉승(穿胸僧, 가슴에 구멍이 뚫린 승려)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죠.


희랑대사상을 자세히 보면 가슴 한가운데 진짜로 구멍이 보입니다.



일일이 다 소개해드릴 순 없지만, 이 밖에도 재미난 이야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를테면 서양에만 있을 법한 인어(人魚)도 나오고, 흔하게는 도깨비나 구미호 이야기도 있고요. 말이 괴물이지 위에 소개한 희랑처럼 전혀 괴상하게 생기지 않은, 괴물 같지 않은 괴물도 많습니다. 중요한 건 이런 수많은 괴물 이야기가 돌고 돌아 이런저런 문헌에 기록돼서 오늘날까지 전한다는 점이겠죠.


그것이 사실인지 허구인지를 따지는 건 무의미합니다. 요는 흔히 말하는 콘텐츠죠. 알맹이 있는 이야기 말입니다. 괴물 백과를 탐독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이야기를 가진 자, 이야기를 만드는 자가 살아남는 법이라고. 이야기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 아니겠느냐고. 그래서 그 풍부한 이야기들을 밑천 삼아 자유롭게 상상의 날개를 펼쳐보는 것, 생각만 해도 흥미진진합니다.




문화와 예술에 관심이 많은 KBS기자.

부족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 틈틈히 책을 읽으면서

미술관과 박물관, 전국의 문화 유산을 찾아다니고 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문화 예술 분야 전문기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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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용진 바이어의 와이너리티 리포트
이마트 26주년을 위한 칠레와인 대장정
명용진 바이어


비행기에 오르고 13시간 41분 그리고 9시간 29분을 더해 총 23시간 10분… 산티아고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 두 번은 오지 않을 거라 다짐했던 이곳에 또 오고야 말았습니다. 네, 맞습니다. 이미 눈치채신 분도 있겠지만 이번 포스팅의 주제는 와인의 신대륙, 그중에서도 ‘칠레 디스커버리’입니다.


많은 분이 포도밭 뭐 그까이꺼~ 다 똑같은 거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요. 사실, 그 나라의 기후와 토양의 특성만 알아도 와인이 어떤 맛인지 짐작할 수 있답니다. 포도밭도 조금 더 깊게 들어가면 많은 차이가 있지만, 이번 시간에는 관광하듯 왜 ‘와인 하면 칠레’라고 하는지만 알아볼 예정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중적인 와인 산지가 칠레니까요!



지구 반대편 와인의 나라, 칠레


인천공항에서 애틀랜타 공항까지 약 14시간. 도착 후 까다로운 미국 입국심사를 마치고 대기. 그리고 다시 비행기에 올라 9시간. 무려 23시간을 오롯이 비행기에서 보낸 끝에 산티아고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남아메리카에 위치한 칠레는 이동만으로 ‘참을 인(忍)’자를 세 번은 써야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계절과 시간은 우리나라와 정반대입니다. 시차는 딱 12시간. 밤낮만 바뀐 시간대 덕분에 시계를 다시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신경 쓸 거리는 하나 줄어든 셈이죠.



길고 고단한 비행 스케줄에 눈의 초점이 흐릿한 상태였지만, 쉴 틈 없이 바로 일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산티아고 남쪽으로 300km 정도 내려가야 하는 여정입니다. 자동차가 커브 하나 없이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이국적인 풍광, 바로 안데스 산맥의 설산입니다. 저 산맥만 넘어가면 바로 아르헨티나입니다. 칠레가 나라의 좌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좁고 긴 나라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합니다.


참, 이번 여행에서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 아타카마 사막 같은 유명 관광지는 근처에도 못 갔으니 그런 기대는 미리 접어두세요. 우리는 칠레 와인의 14개 주요 산지 중 딱 두 군데만 돌아볼 거예요. 이마트에서 매출 비중이 가장 높은 와이너리 중심으로 말입니다.



이마트 국민와인의 탄생지, 아귀레(Aguirre) 와이너리


차를 타고 약 3시간을 내리 달리니 한 시골 마을이 보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포도밭 사이로 흙먼지 뿜어대며 우리가 탄 차량이 진입합니다. 이곳이 바로 이마트의 국민와인, 도스 코파스 까베르네 소비뇽이 탄생한 <아귀레(Aguirre) 와이너리>입니다.



아귀레 와이너리가 위치한 마울레(Maule)라는 지역은 칠레의 대표적인 포도 생산지 중 하나입니다. 의류 브랜드로 비교하자면 SPA 브랜드 같은 곳이에요. 가성비 좋은 와인이 많이 생산되죠. 우리가 잘 아는 1865의 까르미네르 품종도 바로 이곳에서 재배됩니다. 마울레는 다양한 포도 품종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졌는데요. 밤에는 서늘하고 낮에는 일조량이 풍부해 화이트와인 품종인 샤도네이와 소비뇽 블랑이 주로 재배되지만 까베르네 쇼비뇽, 까르미네르, 쉬라 같은 레드와인 품종도 잘 자랍니다. 지역이 서늘한 곳은 신맛과 미네랄이 특징으로 나타납니다.



아귀레 와이너리에서는 광활한 포도밭과 역사가 느껴지는 사무실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사용한다는 대궐 같은 저택과 엄청난 규모의 와인 저장·숙성고, 보틀링 시설과 창고 등을 볼 수 있었는데요. 단순히 비즈니스를 위한 공간이라기보다 순수한 농심과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때마침 보틀링 작업장에서 한국으로 수출될 도스코파스 와인이 병입되고 있었습니다. 광활한 빈야드(Vineyard:포도밭)에 걸맞게 숙성 시설과 병입 장비들의 청결은 기본, 최신 기술로 모든 공정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요. 경쟁력있는 가격의 고품질 상품으로 사랑받는 와이너리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죠.



칠레와인의 명가, 운드라가(Undurraga) 와이너리


자, SPA브랜드 같은 와인 산지를 방문했으니 이제 명품 산지로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다시 북쪽으로 3시간 더 이동해야 하는 그곳은 이름하여 <마이포(Maipo)>! 마이포 밸리는 칠레의 수도인 산티아고와 가까워 접근성도 좋은 곳인데요. 이곳에서 주로 생산되는 품종은 까베르네 쇼비뇽과 멜롯 등의 레드와인입니다. 레드와인 품종의 포도가 잘 자란다는 것은 일조량이 풍부하고 기온이 연평균 20도 정도로 포도 생육에 알맞다는 뜻인데요. 이런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에서는 블랙베리류의 농익은 과일 풍미를 느낄 수 있답니다.



마이포 밸리에서는 국내에서도 유명한 브랜드의 와이너리를 여러 군데 지나칠 수 있는데요. 그중에서도 우리가 방문할 와이너리는 바로 운드라가(Undurraga) 와이너리입니다. 칠레 내수 3위에 빛나는 와이너리로, 국내에서는 운드라가 시바리스와 TH로 유명합니다.



운드라가 와이너리는 신대륙 와이너리 중에서 전통을 잘 유지하고 있는 곳 중 하나인데요. 지하 까브(저장 동굴)에서 수십 년의 먼지를 휘감은 오래된 빈티지 와인을 보니, 마치 프랑스나 이태리의 어느 와이너리에 방문한 느낌이었습니다. 또, 이런 클래식한 면모와는 다르게 생산시설은 매우 현대적이었는데요. 전통과 현대가 적절히 조화된 와이너리라는 인상이 강하게 남았죠.


이곳에서 우리는 이마트 26주년 기념 와인으로 기획된 와인을 시음했습니다. 이름하여 ‘운드라가 싱글 빈야드 #26(Undurraga #26 Single Vineyard Cabernet Sauvignon)’. 이 와인은 프리미엄급인 ‘싱글 빈야드’로 마울레 지역 남서쪽에 위치한 카우케네스(Cauquenes) 지역에서 재배한 포도로 만들어진 와인입니다. 운드라가 떼루아 헌터(TH)와 같은 지역에서 만들어진 와인이라 떼루아 헌터를 즐기는 분들은 더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죠.



이마트 26주년 기념 와인은 싱글 빈야드(Single Vineyard:하나의 밭에서 수확된 포도를 이용하여 만든 와인이라는 뜻)라는 타이틀에 맞게 묵직한 질감과 검붉은 과일 향이 특징인데요. 무려 16명의 운드라가 와이너리의 빈야드 디렉터와 와인 메이커가 컨설팅하여 탄생한 와인입니다. 보통 칠레 싱글 빈야드 와인이 3-4만 원대에 판매되는데요. 이 와인 역시 물량 협의를 통해 극적으로 19,800원이라는 판매가를 맞췄답니다.


자, 저와 함께 짧지만 강렬한 칠레 와이너리 투어를 끝내고 나니 어떠세요? 이제 칠레와인 라벨에서 마이포와 마울레, 카우케네스 정도는 구분하실 수 있겠죠? 각 지역 상품의 특성을 비교하며 와인을 맛보는 것도 와인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에요. 같은 지역의 와인이라도 자연조건이 담지 못하는 부분을 와인 메이킹으로 극복한 상품도 많거든요. 여러 지역의 와인을 골라 비교 시음하다 보면, 매우 저렴한 가격의 훌륭한 상품을 만나는 행운을 얻을 수도 있겠죠?!




이마트 명용진 바이어


치킨에 맥주 마시듯 

와인을 친근하게 알리고 싶은 와인 바이어. 

평범한 일상을 와인만으로 특별하게 만들길 원한다. 

새로운 형태의 프로모션과 혁신적인 가격, 

고품질 와인에 힘쓰고 있는 와인계의 이슈메이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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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의 음식을 쓰다
그리운 추억의 맛, 노포 중국집 BEST3
정동현
#정동현


한국의 전통음식은 불고기일까? 세계에 소개할만한 음식은 김치일까? 그러나 정작 불고기를 자주 먹는 한국인은 드물다. 앞에서는 클래식을 듣는다고 하지만 여전히 메탈리카를 즐겨듣는 내 취향처럼, 한국의 자랑스러운 음식이 아닌 한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을 꼽자면 당연 ‘짜장면’이 맨 앞에 서 있다.



중국 음식이라고, 때로는 ‘짱깨’라는 비속어를 쓰며 낮게 보기도 한다. 하지만 짜장면 한 그릇에 켜켜이 쌓인 기억을 생각해보면 이보다 가까운 음식이 없고 이보다 특별한 요리가 없다. 그리고 이 짜장면을 파는 오래된 중국집들을 보면 나이 든 어르신의 굽은 등을 보는 것처럼 애잔한 마음이 든다. 뼈는 휘고 살은 말랐지만, 여전히 근육이 살아 있다. 땀을 흘리며 느리게 걷지만 멈추지 않는다.



색바랜 간판을 달고 반들반들한 테이블 위에 간장과 식초를 올린 옛 중국집들도 마찬가지다. 중화 냄비를 잡는 노인은 주문이 멈출 때마다 앉을 곳을 찾지만, 주문이 들어오면 익숙하고 빠른 몸짓으로 벌건 불 앞에 선다. 가마솥을 뒤집은 듯 커다란 중화 냄비는 탈을 쓴 곡예사가 사자춤을 추듯이 위아래로 몸을 떨며 흔들린다. 1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웍의 숨결(Wok Hei, 鑊氣)’이라고 하는 하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이 탄생한다. 냄새를 맡으면 채 식지 않은 주방의 열기를 타고 상긋한 채소와 부드러운 고기, 탄력 있는 면의 물성이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것 같다. 그 모두를 아우르는 것은 수십 년간의 노동에 익숙해진 나이 든 육신의 향기다. 그 향기를 맡기 위해 나는 서울 시내의 낡은 간판을 쫓는다.



광화문 뒷길의 50년 터줏대감, 동성각



그 발걸음이 가장 먼저 닿는 곳 중 하나는 광화문 ‘동성각’이다. 세종문화회관 바로 뒤 좁은 골목에 있는 동성각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찾기 쉽지 않다. 널따란 홀이 있는 1층과 방들이 좁게 들어찬 2층이 있고 홀 구석구석 마다 홀로 식사를 하는 이들이 있는 그곳이라면 제대로 찾은 것이다.


메뉴는 전형적인 중국집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런 집의 묘미는 요즘 무슨 무슨 맛집처럼 하나만 딱 먹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마음이 통하는 몇몇과 함께 테이블 하나를 잡고 메뉴를 여럿 시켜야 한다.



오래된 집이 보통 그렇듯 이 집도 메뉴 뭐 하나 빠지지 않지만 그래도 닭고기를 튀겨 마늘소스를 곁들인 뒤 양상추와 함께 내는 유린기, 그리고 고기와 해삼 등을 얇게 채 쳐서 빠르게 볶아낸 유산슬은 시켜보는 편이 좋다. 바삭하게 튀긴 유린기 닭튀김의 겉면은 아삭거리고 고기는 부드럽게 씹힌다. 양상추는 튀김옷과 함께 왈츠를 밟듯 경쾌한 식감을 이루고 달고 짭조름한 마늘소스는 변박자로 요리에 재미를 불어넣는다.


칼질과 빠른 타이밍에 양념을 넣고 볶아야 하는 기술이 중요한 유산슬은 의외로 제대로 하는 집이 드문 요리다. 사람들의 취향은 탕수육과 같은 튀김 요리로 쏠리고 있고 덕분에 유산슬과 같은 볶음 요리는 아예 취급하지 않는 곳도 많다. 그러나 간장이 뜨거운 열을 만나 캐러멜과 같은 독특한 향기를 만들고 해삼, 돼지고기, 아스파라거스 같은 재료들이 소스의 힘에 하나의 요리로 만들어지는 모습은 중식당이 아니면 볼 수 없는 모습이다. 기다란 중화풍 젓가락으로 중국 영화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요리를 나누어 먹는 정취 역시 그렇다.



관광지의 소음도 비껴가는 장인의 맛, 혜빈장



광화문을 떠나 서쪽으로 멀리 길을 떠나면 동인천 차이나타운 근처에 있는 ‘혜빈장’에 다다른다. 조악한 장식물과 뜨내기손님을 끄는 세트 메뉴가 장악한 인천 차이나타운은 소문만 무성하고 실제 먹을 것은 드물다. 그곳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 무심히 콘크리트 도로가 깔렸고 사람들이 터벅터벅 걸으며 잠시 허리를 펴며 쉬는 곳에 혜빈장이 있다.


페인트칠한 단층 건물에 문을 당겨 들어가면 안에는 테이블 몇몇이 단출히 놓여 있을 뿐이다. 주방에 서 있는 요리사는 한눈에도 은퇴를 앞둔 것처럼 보이고 홀에서 손님을 맞는 이 역시 일반 정년을 훌쩍 넘어선 것이 확실하다. 이곳은 메뉴가 다른 곳처럼 길지 않다. 손님이 적은 수가 아닌 것이 첫째 이유, 혼자서 주방을 보는 노구(老軀)가 이겨낼 수 있는 노동의 한계도 명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오는 음식을 보면 타협이 이루어지는 지점은 낮지 않다. 주방을 홀로 책임지기 때문에 주문이 밀리면 꽤 기다려야 한다. 바쁠 때 후루룩 먹고 가는 식당은 아니다. 하지만 바다를 가까이 한 동인천의 옅은 소금물 냄새, 그 냄새와 함께 바래간 건물과 켜켜이 쌓인 시간을 느끼다 보면 그다지 긴 시간은 아니리라.



주방에서 치익치익 채소가 불에 닿아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흘러나오면 식욕이 조금씩 요동친다. 어릴 적 동네에 놀러 나갔다가 들어와 허기진 마음으로 밥상을 기다리던 그때처럼 얌전히 앉아 있으면 어느새 그릇이 앞에 놓인다. 산미가 진하게 풍기는 옛날식 탕수육도 좋지만, 이곳에서 무조건 먹어봐야 할 음식은 간짜장과 짬뽕이다.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한 음식이지만 이곳의 음식은 시간 속에 희석되거나 바래지지 않은 힘이 담겨 있다.


채소와 고기를 칼로 잘게 다진 뒤 춘장과 함께 볶아낸 간짜장은 질척거리거나 둔탁하지 않다. 한가닥 한가닥 선이 보이는 수공예품처럼 간짜장의 재료는 알알이 살아 있다. 면을 슥슥 비벼 입에 넣으면 강한 자극보다는 유순히 머리를 쓰다듬는 정겨운 맛이 느껴진다. 단맛은 절제되어 있고 간간한 맛은 해무처럼 그윽하게 깔려 튀지 않는다. 짬뽕은 그에 비해 맛이 강하다. 바닷가에 앉아 해산물을 듬뿍 넣어 끓인 탕처럼 매운맛이 의외로 강해 이마에 땀이 조금씩 맺힌다. 그릇을 비울 때쯤 해서는 ‘캬’하는 탄성도 나오는데 그때마다 무심히 흘러간 시간이 몸으로 느껴진다.



수타면이 불러오는 추억의 그 맛, 현래장



먼 길을 돌아 다시 서울로 올 시간이다. 서울에서도 오래전부터 음식점이 많았던 마포의 ‘현래장’으로 가보자. 불교방송국 빌딩 지하에 있는 현래장은 마포 먹자골목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 있다. 상가도 몇 되지 않는 지하에 무슨 중국집일까 생각하다 막상 그 앞에서 서면 꽤 큰 규모에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안으로 들어서면 멀리 통유리로 막힌 주방이 보인다. 그 안에는 머리가 하얀 주방장에 가운데 섰고 그 양 옆으로 당당한 체격의 요리사가 몇 서서 중화 냄비와 칼을 잡고 있다.



이곳의 모든 면 요리는 수타면을 쓴다. 당연히 면 요리에 강점이 있고 그 짐작은 틀리지 않는다. 포슬포슬한 감자와 달달한 양파를 크게 썰어 넣은 옛날짜장은 잊혔던 기억을 새삼스럽게 되살린다.


어머니에게 졸랐던 짜장면, 졸업식 날이면 으레 먹었던 짜장면, 군대 휴가를 나와 먹던 짜장면, 그 하찮은 음식과 맞닿은 추억이 너무 많아서 실상 제대로 세어지지 않는 시간들. 그리고 그 시간들이 모여 이뤄낸 나란 사람. 그런 상념들이 흩어지며 입속으로 짜장면을 밀어 넣는다. 탄성이 있는 면발은 기계로 뽑은 것과는 결이 다른 쫄깃한 맛을 낸다. 면발이 입술을 치고 목구멍을 때린다. 진한 갈색빛을 한 짜장에 얽힌 단맛과 짠맛, 고소한 풍미. 오랫동안 알고 지낸 맛이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맛이다. 맛과 시간이 면처럼 얽혀 몸에 스며든다.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 정동현 셰프


신세계프라퍼티 리징 2팀에서 '먹고(FOOD) 마시는(BEVERAGE)'일에 몰두하고 있는 셰프,
오늘도 지구촌의 핫한 먹거리를 맛보면서 혀를 단련 중!
저서로는 <셰프의 빨간 노트>가 있다.